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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없는 손으로 아버지가 맞춰준 작업 환경

by 쑈휴 2026. 8. 30.

제가 코딩하는 데 쓰는 모니터도, 스마트폰 거치대도 제가 설치한 게 아닙니다. 병원침대 옆에서 입술로 조작할 수 있는 각도와 높이와 거리를 아버지가 전부 맞춰주셨습니다. 아버지는 2005년 산재 사고로 왼쪽 손목이 절단되셨습니다. 그 손으로 만들어주신 환경 이야기를 적습니다.

먼저 제 작업 환경이 어떤지

저는 중증 뇌병변 장애가 있어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스마트폰 화면을 입술로 터치해 컴퓨터를 원격 조작합니다.

그래서 제 작업 환경은 책상이 아닙니다. 병원침대 옆입니다. 앉을 수 없으니 누운 자세에서 모든 게 닿아야 합니다.

이 조건이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시중에 파는 거치대는 대부분 앉아 있는 사람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책상 위, 눈높이, 팔이 닿는 거리. 저한테는 그 세 가지가 전부 안 맞습니다.

맞춰야 했던 것들

누워서 입술로 조작하려면 아래가 동시에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아예 못 씁니다.

  1. 각도 — 누운 시선에서 화면이 정면으로 보여야 합니다. 조금만 기울어도 반사가 생기거나 목을 꺾어야 합니다.
  2. 높이 — 입술이 화면에 닿아야 합니다. 너무 높으면 안 닿고, 너무 낮으면 얼굴을 눌러야 합니다.
  3. 거리 — 목을 크게 움직이지 않고 화면 구석까지 닿아야 합니다.
  4. 고정력 — 입술로 누를 때 밀리면 안 됩니다. 밀리면 클릭 위치가 틀어집니다.

이 네 가지를 제 몸에 맞춰 잡는 일을 아버지가 하셨습니다. 제품을 사서 얹은 게 아니라, 제가 누운 자리에서 실제로 되는지 확인해가며 맞추셨습니다.

아버지 손은 어떤 상태인가요?

왼쪽 손목이 없습니다. 2005년 산재 사고로 절단되셨고, 네 손가락을 손목이 있던 자리에 접합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의 왼손은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 네 개가 붙어 있는 형태입니다. 원래 손처럼 쥐고 돌리는 동작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런 손으로 나사를 조이고 각도를 잡고 높이를 맞추셨습니다. 저는 그 과정을 옆에서 봤습니다.

그런 손으로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주신다.

"입술로 코딩한다"는 말의 앞부분

저는 스스로를 "입술로 코딩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소개에는 빠진 앞부분이 있습니다.

입술로 코딩하려면 입술이 닿는 위치에 화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화면을 거기에 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것들이 있습니다. LyricFlow라는 자막·가사 번역 웹앱을 만들었고, ExcelScrapper라는 링크 정리 도구도 만들었습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도 같은 방식으로 씁니다.

그런데 그것들 전부가 아버지가 먼저 만들어주신 환경 위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환경이 없으면 시작 자체가 안 됩니다.

참고: 누워서 쓰는 환경을 만들 때

아래는 제 사례를 일반화한 참고 사항입니다. 신체 조건이 사람마다 다르니 반드시 당사자에게 맞춰 확인해야 합니다.

  • 제품을 먼저 고르지 말고 자세를 먼저 정합니다. 어떤 자세로 몇 시간 쓸 것인지가 기준입니다.
  • 당사자가 실제로 누운 상태에서 맞춥니다. 빈 침대에 맞추면 반드시 틀어집니다.
  • 고정력을 과하게 잡습니다. 조작할 때 밀리면 정확도가 통째로 무너집니다.
  • 미세 조정이 가능하게 둡니다. 컨디션에 따라 자세가 달라지므로 한 번 고정하고 끝내면 안 됩니다.
  • 전원과 케이블 경로를 같이 계획합니다. 나중에 추가하면 각도가 다시 틀어집니다.

보조공학기기 지원 제도는 보조기기 열린뱅크 같은 공공 창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도가 틀어지면 벌어지는 일

거치대 각도가 몇 도만 어긋나도 작업이 통째로 막힙니다. 저는 이걸 여러 번 겪었습니다.

화면이 살짝 기울면 입술이 닿는 지점과 실제 터치 지점이 어긋납니다. 화면 가운데는 눌러지는데 가장자리 버튼이 안 눌립니다. 브라우저 닫기 버튼이나 메뉴 같은 게 화면 구석에 있으니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높이가 어긋나면 더 심합니다. 조금만 높아도 목을 들어야 하는데, 그 자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습니다. 5분은 되고 한 시간은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작업을 못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세팅은 취향이 아니라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입니다. 맞으면 몇 시간 일하고, 안 맞으면 0분입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놀랍니다. 화면 각도가 그렇게까지 중요하냐고요. 앉아서 쓰는 사람은 몸을 움직여 화면에 맞추면 되니까 체감이 안 됩니다. 저는 몸을 못 움직이니 화면이 저에게 와야 합니다.

환경을 만드는 일도 기술입니다

저는 접근성 이야기를 할 때 소프트웨어 쪽만 이야기되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화면 낭독기, 대체 입력, 자막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제 경우 물리적인 각도와 높이가 먼저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가 있어도 화면에 손이나 입술이 안 닿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물리적인 부분은 대체로 제품으로 안 팔립니다. 사람마다 몸이 다르니까요. 결국 누군가가 직접 맞춰줘야 합니다.

아버지가 만든 것과 내가 만든 것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와 저는 결국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손목이 없는 손으로 나사를 조이고 각도를 맞추십니다. 저는 손이 안 움직이는 몸으로 코드를 씁니다. 둘 다 원래 방식대로는 안 되는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걸 저한테 말로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필요한 걸 만들어 오셨을 뿐입니다. 근데 저는 그걸 보고 자랐습니다.

제가 "안 되면 방법을 만들면 된다"고 자주 쓰는데, 그 문장은 제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먼저 그렇게 사는 사람을 옆에서 봤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자주 받는 질문

Q. 특수 제작 장비인가요?

특수 장비라기보다 일반 부품을 제 자세에 맞게 조합한 것에 가깝습니다. 핵심은 제품이 아니라 각도와 높이입니다.

Q. 아버지가 원래 이런 걸 잘하셨나요?

필요해서 하신 겁니다. 제가 쓸 수 있는 환경이 시중에 없으니 직접 만드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Q. 한 번 맞추면 계속 쓰나요?

아닙니다. 제 자세나 컨디션이 바뀌면 다시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조정이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Q. 이런 환경 없이도 코딩이 가능한가요?

저는 불가능합니다. 환경이 곧 가능 여부입니다.

그래서 남기고 싶은 말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보고 "손을 못 쓰는데 코딩을 한다"에 놀랍니다. 저는 그 반응이 반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 건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실제로 작동하게 만든 건 손목 없는 손으로 각도를 맞춰준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못 했을 겁니다. LyricFlow도, ExcelScrapper도,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항상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제가 2026-04-10에 스레드에 올리고 직접 겪은 일을, 빠졌던 맥락과 확인 방법까지 더해 다시 쓴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 원본 스레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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