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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톤보리의 밤: 글리코상, 인파, 그리고 김해에서 온 가족

by 쑈휴 2026. 3. 3.

호텔 로비에서 조식 식당 층수를 물어보는 일본어 미션을 겨우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니, 이제 진짜 오사카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시 54분, 로비 거울 앞에서 가족 셀카를 한 장 찍고 곧바로 도톤보리(道頓堀)로 향했습니다. 구글맵상으로는 도보 10분 남짓이었지만, 저희에게는 그 짧은 길도 오사카 첫날 밤의 분위기를 통째로 보여주는 산책이었습니다.

김해 율하에서 온 가족이 찍어준 글리코상 앞에서의 가족사진
김해 율하에서 온 가족이 찍어준 글리코상 앞에서의 가족사진

 

1. 호텔에서 도톤보리강까지 걸어간 10분

호텔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공기의 변화였습니다. 낮에는 너무 덥고 습해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는데, 해가 지고 나니 거리에 조금씩 여유가 생겼습니다. 상점 간판들이 하나둘 켜지고, 식당 앞에는 저녁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난바의 큰 도로는 낮보다 훨씬 선명한 색으로 살아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버지는 제 휠체어를 밀고, 어머니는 제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걸었습니다. 세 식구가 외국 도시의 밤거리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묘하게 들떴습니다.

호텔에서 도톤보리까지의 길은 아주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큰 길을 따라 쭉 이동하면 되었고, 밤에도 인도 조명과 상점 불빛이 밝아 휠체어로 가기에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낮에 이미 느꼈던 것처럼 인도 표면이 비교적 매끈했고, 횡단보도 앞 단차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밤에 휠체어로 이동할 때 바닥 틈이나 턱이 잘 안 보여 더 긴장하게 되는데, 그날 난바 시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기획자인 제 입장에서도 '첫날 밤 동선은 잘 짰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20시 03분부터 20시 10분 사이, 드디어 도톤보리강 앞에 도착했습니다. 강물이 보이자 저희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고, 첫 야경 사진부터 남겼습니다. 물 위에 반사된 네온 조명이 흔들리는 모습은 사진보다 실제가 훨씬 진했습니다. 강을 따라 늘어선 간판과 조명들이 한꺼번에 비치니, 도톤보리라는 이름이 왜 늘 밤 풍경과 함께 기억되는지 바로 이해가 됐습니다. 도착한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아, 오사카에 제대로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2. 인파를 뚫고 에비스바시까지

20시 15분부터 24분까지는 도톤보리 중심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습니다. 강 앞에서 보는 풍경은 넓고 시원했지만,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금요일 밤 도톤보리 한복판답게 걸음이 술술 나가는 구간은 거의 없었고, 조금 전진했다가 잠시 멈추고, 다시 빈틈을 보고 움직이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휠체어에 앉아 위쪽 간판과 사람 흐름을 번갈아 보며 길을 읽었고, 아버지는 제 뒤에서 가장 안전한 틈을 골라가며 휠체어를 밀어주셨습니다.

이럴 때 가장 고생하는 건 역시 휠체어를 직접 미는 사람입니다. 앞사람이 갑자기 멈추거나 고개를 돌리면 바로 속도를 줄여야 하고, 옆에서 누가 밀고 들어오면 바퀴 각도까지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필요할 때마다 작게 "지나갈게요"라고 하시며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행히 저희를 보고 슬쩍 비켜주시는 분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누가 크게 도와준다는 느낌보다는, 지나갈 공간 정도는 조용히 내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반응은 휠체어로 인파를 지나야 하는 입장에서는 꽤 크게 다가왔습니다.

20시 26분에는 타코야끼집 앞을 지나쳤습니다. 그때는 잠깐 멈춰 냄새를 맡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고소한 향이 진했지만, 우선순위는 분명했습니다. 먼저 글리코상 앞에 가서 사진을 찍고, 먹는 것은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메모를 해두고 다시 전진했고, 20시 28분 마침내 에비스바시(戎橋)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오사카 여행을 기획할 때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포인트에 드디어 도착한 것입니다.

3. 20시 28분, 드디어 글리코상 앞

다리 위에 올라서자 강 건너편의 글리코상(グリコサイン)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양팔을 벌린 러닝맨 포즈를 실제로 보는 순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실감이 밀려왔습니다.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수도 없이 봤던 장면인데, 막상 제 휠체어 바퀴가 에비스바시 위에 올라와 있고 그 정면에 글리코상이 서 있으니 그제야 '아, 진짜 여기까지 왔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은 결국 이런 확인의 순간 때문에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20시 29분부터 34분까지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리 위에는 이미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버지가 휠체어 위치를 난간 쪽으로 잘 잡아주신 덕분에 사람 흐름을 크게 막지 않으면서도 정면 구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들고 각도를 바꿔가며 여러 장을 찍어주셨고, 저는 글리코상이 가장 잘 들어오는 방향을 계속 확인했습니다. 한 장은 인물 위주로, 한 장은 배경이 넓게 보이도록, 또 한 장은 세 식구 표정이 다 살아있게 찍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은 나중에 봐도 그 순간 공기의 밀도까지 떠오를 정도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실 그 장면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오사카의 유명 포토존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침부터 공항, 전철, 호텔 체크인까지 하나씩 넘어오며 쌓인 긴장이 그 다리 위에서 조금 풀렸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낯선 나라에서 이동만 해도 정신이 없었는데, 밤이 되자 비로소 '여행을 즐기는 모드'로 넘어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리코상을 배경으로 부모님과 같이 서 있다는 사실이, 그날 하루 전체를 보상해 주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4. 오사카 한복판에서 만난 김해 율하 가족

개인 사진은 꽤 찍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 식구가 모두 들어가는 단체 사진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찍으면 어머니가 빠지고, 아버지가 찍으면 아버지가 빠지니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주변을 살폈는데, 마침 근처에 계시던 한국인 가족분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찍어드릴까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복잡한 도톤보리 한가운데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확 놓였습니다.

어머니 스마트폰을 건네드리자 그분들은 글리코상이 배경에 잘 들어오도록 구도를 금방 잡아주셨고, 덕분에 세 식구가 모두 나온 단체 사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짧게 감사 인사를 나누다가, 그 가족분들이 김해 율하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저희도 김해 쪽 생활권에 익숙한 가족이다 보니, 일본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갑자기 김해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했습니다. 멀리 여행을 와서 오히려 집 가까운 지명이 들리니, 순간 도톤보리가 낯선 외국 관광지가 아니라 동네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 장소처럼 느껴졌습니다.

여행에서 이런 우연은 오래 남습니다. 유명한 야경이나 맛집도 기억에 남지만, 결국 사람 때문에 어떤 밤이 특별해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글리코상 앞의 네온사인과 함께, 그날 저희 가족의 표정을 가장 따뜻하게 남겨준 것도 바로 그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오사카에서 만난 김해 율하 가족'이라는 설명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인연이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도톤보리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더 밀도가 높았습니다. 강가에 도착했을 때의 시원한 야경,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의 인파, 에비스바시 위에서 마주한 글리코상,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김해 율하 가족과의 만남까지. 불과 40분 남짓한 시간 안에 오사카라는 도시가 가진 화려함과 복잡함, 그리고 이상하게 따뜻한 순간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글리코상 앞에서 단체 사진까지 무사히 찍은 뒤, 저희는 다리를 건너 돈키호테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에비스바시 옆길로 내려가는 경사로 아래에는 또 다른 도톤보리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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